성경적 설교를 위한 제안 (1) - 특별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 Dr. Haddon Robinson 등 목회자 및 신학자들의 공저로 제작된 The Art and Craft of Biblical Preaching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약력) 미국 서던메소디스트대학교와 달라스신학교(Th.D.) 그리고 일리노이스대학교(Ph.D.)에서 공부했으며 미국 달라스신학교와 고든콘웰신학교 교수 및 덴버신학교 총장직을 역임했다.
<특별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해돈 로빈슨 – 미국 덴버신학교 총장 역임
나는 목회자가 없었던 메사추세츠 두 렉싱턴의 그레이스채플에서 1년여 동안 자주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의 층은 놀랍도록 다양했다.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로부터 고동학교 중퇴자들까지 있는가 하면, 의사, 변호사, 건물 청소부, 정치가들 그리고 신문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투자가가 있는가 하면 최소 임금 노동자들도 출석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도들의 인종과 피부색도 매우 다양했다.
나는 그들 모두의 가슴에 내려앉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매주 다양한 사람들 앞에 섰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설교가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질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설교자로서 우리의 사명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라
교회 안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설교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마치 부러진 팔밖에 고칠 줄 모르는 의사와 같다. 모든 부류의 청중에게 폭 넓게 다가가려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여려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 9:22)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단지 전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약한 자들’ 즉 양심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약한 자가 되었다. 자신의 자유를 연약한 자들을 위해 제한했던 것이다.
설교자에게는 다양한 청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희생이 요구된다. 모종의 유머를 즐기거나 소수 집단을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으로 부르는 자유, 우리에게 흥미로웠던 책이나 영화에서 예화를 사용하는 자유, 우리의 교욱 수준이나 영적 헌신도에 기초해 사람들에게 설교하려 드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때로 그렇게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일처럼 느낄 때도 있다.
일례로 여성 운동에 반감을 가진 목사가 지나가는 말이라도 그들의 지도자나 활동에 대해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 여성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거리감을 조장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을 포기할 때, 우리가 얻은 것은 설교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이다. 만일 바울이 율법을 무시했다면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문제에 대해 전혀 민감하지 못한 설교자를 여성 성도들은 신뢰하지 않으려 한다. 왜 우리가 이런 곤란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고 현명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그들은 목회자에게서 한 마디라도 공격적으로 느끼면 쉽게 도망가 버린다. 이미 울타리 안에 안전하게 있는 사람들은 목회자가 큰 실수를 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가가려 하는 새신자들은 야생 칠면조처럼 쉽게 놀라 달아나 버린다.
한 젊은 부부가 시카고 근교로 이사를 와서 몇 달 동안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남편이 실직해 있는 동안 교회에서 도움을 주었다. 교회의 목사도 그 남편을 몇 차례 만났다. 그는 생태학 학위를 소유한 자였고 교회에 깊이 헌신하고자 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와 아내가 교회에 보이지 않았다. 목사는 몇 번이고 그 부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몇 달이 자나서야 비로소 그 남편과 함께 식사를 나눌 수 있었다. 목사는 왜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가 대답하길 “목사님께서 과학을 경시하는 설교를 몇 번 하셨지요. 목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의 사고 방식과 다른 것 같습니다.”
목사는 자신이 한 말을 더듬어 보았다. 그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인간의 연약함을 비교하면서 그저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를 던졌거나 수사학적 표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냥 지나가는 미풍이 아니었다. 주님의 제자로서 더 깊이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한 사람을 곁길로 벗어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우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 경비원과 투자 은행가처럼 서로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람들의 말을 청취하고 관찰하는 소설가처럼 하면 된다. 우리는 상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주고 식당이나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경청해 보라.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나 뉴스에서 인터뷰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관찰해 보라. 그들이 자신의 관심을 어떻게 말하는지,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무엇이고 감정은 어떠한지, 그들이 관심을 두는 게 무엇인지 세밀하게 살펴보라. 그들의 대화에 기울여 보라.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은 설교하기 전 매주 목요일에 핵심 그룹을 소집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점심을 나누면서 이번 주 설교의 중심 사상을 말해 주고 그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들리는지 물어본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종종 제기하기도 한다.
어느 주일, 예배 후에 한 여성이 찾아와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몇몇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뉴욕 타임스>에 광고를 실었다고 했다.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흑인의 경험을 끌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소외된 자들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우리 흑인들도 소외된 자들이죠.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어 왔는지 전혀 몰라요. 흑인이라는 이유로 겪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들이죠.”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소수자들이 겪는 불이익에 대해 알게 되었다.
특정 부류의 청중을 목표로 삼아라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동일하게 다루는 법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기심 많은 한 바리새인에게는 거듭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고,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는 생명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각각의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가가셨다.
신약의 서신들은 동일한 신학일지라도 다양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내용이 서로 다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을 향해 부활의 교리를 변호했다. 그런가 하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 여려하는 자들을 위해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 성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진리를 희석시키지 않으면서 청중에게 알맞게 메시지를 조절하신다. 진리는 한 사람의 개인적 상황에 연결될 때 가장 강력한 체험이 일어난다.
일반적인 이야기만 하는 설교는 특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다. 설교는 두세 유형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 놀라운사실은 메시지가 보다 직접적이고 개인적일수록 더욱 보편적이 된다는 점이다.
갈등에 관해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 수 있다. “친구와 함께 방을 쓴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친구가 식사 후에 바로 설거지를 하지 않는 등으로 당신을 짜증나게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결혼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남편이 집에 돌와와 텔레비전 앞에서 머리를 파묻은 채 당신이 하루종일 어떻게 지냈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의 예는 모든 청중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전부가 이런 경험에 공감하고 그 감정이 어떤지 느낄 수 있다.
설교할 때 다양한 청중이 경험하는 삶에 더욱 다가서기 위해 나의 친구인 돈 수니키안의 제언을 사용한다. 설교를 준비할 때 삶의 상황을 알려 주는 눈금표를 만드는 것이다. 몇 개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눈금표의 맨 윗부분에는 가로로 남성, 여성 독신, 기혼자, 이혼자, 동거자 등의 표를 만든다. 눈금표의 측면에는 새로로 다른 연령 그룹들(실직자, 자영업자, 노동자, 경영자), 신앙 수준(헌신적인 그리스도인, 의심이 가득한 자들, 냉소주의자들, 무신론자들), 병든 자와 건강한 자 등의 표를 만든다. 내가 설교하는 대상과 공동체에 기초해 이 눈금표를 만든다. 나는 성경 본문을 연구하고 중심 사상을 발전시킨 후 눈금표를 살펴보면서 이 메시지가 특별하게 들어맞는 둘에서 넷 정도의 교차점을 찾는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본문으로 돈에 관해 설교할 때 눈금표를 살피면서 한 과부를 생각했다. 큰 회사의 사장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죽으면서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 언젠가 그녀가 한 말이다.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저주인지요!” 나는 성도들 중에 수입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알고 있기에 부유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듣고 어떻게 듣고 어떤 느낌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눈금표에서 또 하나의 교차점은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고려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액수에 관신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보신다고 설교했다.
세 번째로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했던 사람들은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방문객들이었다. 아마 그들은 설교를 들은 후 이렇게 말하리라. “목사들이 하는 일이란 돈에 대해 설교하는 것밖에 없어….” 나는 눈금표에 올려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설교에 유머도 포함시키고 반대 의견도 직접 다루었다(때로 나는 교회 안에 특정 부류의 사람들, 말하자면 사업하는 젊은 남성이나 여성 혹은 십대들에게만 설교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럴 경우에 다음과 같이 설교를 시작한다. “오늘 아침에 나는 십대들에게 설교하고 싶습니다. 어른이 된 당신들은 주일 아침 예배에 참석해 짧은 겨울 낮잠을 즐기시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만, 오늘 아침에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하겠습니다. 오늘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청소년들은 우리 교회에 중요한 지체들입니다. 이 설교에 귀를 기울인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이 설교의 모든 적용은 젊은이들에 맞춰진 것이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인들은 드물 것입니다. 사실 간접적으로 들려지는 내용이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보다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예화를 폭넓게 사용하라
우리가 매주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하면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표적으로 삼을 수 있지만, 모든 청중은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거나 하나님에게서 도망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웃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심각하게 느끼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더 잘 할 수 있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격려받기 원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을궁지에 내버려 두지 않고 자신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이런 보편적인 관심사를 다루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예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상에 관심을 갖기보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원리보다 사람들에게 대해 잡담하기를 즐긴다. 좋은 이야기는 한 사람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해 줄 수 있다. 청중은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들의 경험 및 이미지와 연결시켜서 그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 준다.
나는 청중으로 하여금 나의 설교와 정서적으로 열결될 수 있도록 광범위하게 예화를 사용한다. 때로 많은 예화를 스포츠에서 끌어오고 싶을 때가 많다. 이런 예화를 대다수(쇼회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의 여성도들에게 호소력을 얻을 수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화 즉 인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집안 이야기, 가족 이야기, 여성들이 일터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사용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나는 델레비전을 보면서도 예화를 찾으려 한다. 사실 나는 일는 책에서 예화를 끌어오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가 읽는 것을 대부분의 청중은 읽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나와 다른 영역이다. 나의 설교에 그 점을 존중하려 한다.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예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청중이 자신들을 그 이야기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 이야기의 참여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고든 맥도널드가 세례 요한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이를 능수능란하게 보여 주는 것을 보았다. 맥도널드 목사가 상상력을 동원해 요한의 사역을 설명했을 때 모든 청중은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의 기억에 그의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요단강에서 군중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자 경영자 타입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조직적으로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테이블을 설치하고 회개하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꼬리표를 달아 주기 시작했습니다. 꼬리 위에 그 사람의 아름과 가장 큰 죄목이 씌여 있었습니다. 밥이 테이블 앞으로 걸어옵니다. 주최측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꼬리표에 적고 묻습니다. “밥, 당신이 지은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저는 사장의 돈을 유용했습니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큰 펜을 꺼내어 대문자로 ‘공금 횡령자’라고 써서 밥의 가슴에 찰싹 붙입니다. 다음 사람이 나아옵니다. “이름이 뭐죠?” “메리예요.” “메리, 당신이 지은 가장 큰 죄는 무엇입니까?” “저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 험담을 했어요.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을 씷어했어요.” 주최측 사람들은 씁니다. “메리, 험담하는 자.”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찰싹 붙입니다.
한 남가자 테이블로 걸어옵니다. “이름이 뭐죠?” “조지입니다.” “조지 당신이 지은 가장 큰 죄는 무엇입니까?” “우리 이웃이 가진 코르벳(Corvette)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조지, 탐욕자”라고 씁니다. 또 한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옵니다. “이름이 뭐죠?” “고든입니다.” “당신의 죄는 무엇입니까?”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주최측 사람은 ‘고든, 간음자’라는 꼬리표를 그의 가슴에 붙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로 오십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줄을 따라 오셔서 각 사람의 죄 꼬리표를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꼬리표를 떼시고 그것들을 그부늬 몸에 붙이십니다. 이제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분의 몸에 붙은 꼬리표의 먹물은 강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습니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가 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때 모든 청중은 마음 속으로 자신의 죄목을 기록한 후에 자신들의 가슴에 붙였다. 이 예화는 구체적이면서도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금을 울렸다. 나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때로 종이 위에 ‘이이디어 네트워크’를 작성한다. 예를 들어 가정에 대해 설교한다면 종이에 ‘가정’이라는 단어를 쓰고 그 단어에 동그라미를 친 후 마음에 떠오르는 관련 단어들을 기록한다.
‘안락한 가정, 잘 돌아왔어. 집으로 다시 돌아오니 참 잘 됐어. 목장 위에 있는 집,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 빼앗긴 가자어’ 등 이런 연상들은 개인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다른 기억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문화가 가정이라는 말과 연결된 구절이나 느낌을 찾고자 하는 점이다. 이러다 보면 좀 더 호소력 있는 한 개나 그 이상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하라
나는 성도들을 존중하고 그들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것은 내가 모든 사람들을 얻기 위해 모든 모양으로 되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예를 들어, 나는 설교할 때 대화식으로 이끌어간다. 귄위적이고 강의식으로 대하는 태도를 싫어하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다. 이런 태도 때문에 현대인들은 설교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나에게 제발 설교하지 마세요!’). 이런 설교에 대해 사람들은 아이들을 대할 때나 편협한 사고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긴다.
떠 한 가지 내가 노력하는 것은 공감하는 마음을 보이고자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라는 말라기 2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할 때, 청중 가운데 이혼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해돈 라빈슨이 자신들을 미워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나면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여러분들 중에 이혼하신 분들은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시는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혼한 사람들을 미워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혼이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혼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죠. 이혼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증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상처를 주는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설교자가 청중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된 느낌을 준다면 사람들은 좀 더 강한 설교에도 들여려 할 것이다.
내가 청중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또 다른 방법은 설교에서 용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이다. 당신이 전혀 편견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당신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쓸 때 청중은 당신을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나는 성에 대한 표현에서 여성들을 배려하기도 한다. 에를 들어, 어떤 의사에 대해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한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서 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메스가 들려 있죠.” 전략적으로 필요할 때 ‘그’라는 표현보다 ‘그녀’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용어들 중에 ‘대변인’(spokesman)이라는 남성적 표현보다 ‘중성적 표현’(spokesperson)을 사용하려 한다. ‘그’라는 표현보다 ‘그녀’라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 ‘그’와 ‘그녀’를 번갈아 사용하기도 한다. 설교에 여성 대명사를 몇 번만 사용해도 효과는 대단하다(한 가지 극단적인 실험을 해 보라. 한 편의 설교에서 반드시 남성적 표현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 ‘그녀’를 끝까지 사용해 보라. 우리의 설교가 얼마나 남성적인 냄새가 많은지 알게 될 것이다).
소수 민족을 위해서도 그들이 불러 주기를 원하는 식으로 부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찰스’라면 누군가 ‘찰리’ 혹은 ‘척’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검둥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흑인이라고 부르다가 최근 설교에서 아프리카 미국인(African-America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얼마 후 한 여성이 나의 잘못을 친절하게 바로 잡아 주었다. “그 사람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이랍니다.”
진리는 타협하지 말라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강단에서 사과해야 할 때도 있다.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사용한 유머가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비만을 가진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표현을 했습니다. 때로 본의 아니게 어뚱한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저에게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그레이스채플에서 설교하는 동안 나의 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편지를 적어도 한 주에 한 통은 받았다. 누군가 편지를 쓰면 나는 반드시 답장을 보낸다. 심각한 편지를 보낼 때는 나도 깊이 있게 답장을 써서 보낸다. 때로 그들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을 때가 있다. 내가 가진 편견을 깨우쳐 준다. 내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사람들의 비방을 받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생책이다. “편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성경의 위대한 진리를 전하고 싶었는데 당신에게 이해시켜 드리지 못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일에 너무 고심하거나 감정이 상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편지를 받다 보면 질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문장 하나하나에 정신을 빼앗긴다. 이럴 경우에 설교는 방어적이고 눈치만 보면서 뼈대도 없이 애매하게 끝날 수도 있다.
그렇다. 크리스마스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 해 중에서 가장 우울한 때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런 일로 교회가 성탄의 기쁨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어버이날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없는 부모에게는 극심한 고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공경해야 할 부모가 있고 교회가 그분들을 공경하는 것을 막아선 안 된다.
나는 지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강단에서 초조해 하거나 방어적이거나 적대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더 쉽게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지 마세요”라거나 “겉보기에 그럴 듯한 모든 말에 진저리가 납니다”라는 말은 설교자나 회중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목사가 어느 정도 신경을 쓰지 않는 상태에서 설교해야 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시비의 말을 삼가고 가슴에 부담을 담고 말해야 한다. 목사가 강단에서 쫓겨날 각오로 하는 설교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때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들이 되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언제나 건전한 불안감이 들게 마련이다. 성경도 이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도를 걸어야 할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를 원하지만 진리를 타협해가면서 해선 안 된다. 우리가 정도를 걷는다면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관심을 지닌 많은 분류의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 Dr. Haddon Robinson 등 목회자 및 신학자들의 공저로 제작된 The Art and Craft of Biblical Preaching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약력) 미국 서던메소디스트대학교와 달라스신학교(Th.D.) 그리고 일리노이스대학교(Ph.D.)에서 공부했으며 미국 달라스신학교와 고든콘웰신학교 교수 및 덴버신학교 총장직을 역임했다.
<특별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해돈 로빈슨 – 미국 덴버신학교 총장 역임
나는 목회자가 없었던 메사추세츠 두 렉싱턴의 그레이스채플에서 1년여 동안 자주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의 층은 놀랍도록 다양했다.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로부터 고동학교 중퇴자들까지 있는가 하면, 의사, 변호사, 건물 청소부, 정치가들 그리고 신문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투자가가 있는가 하면 최소 임금 노동자들도 출석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도들의 인종과 피부색도 매우 다양했다.
나는 그들 모두의 가슴에 내려앉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매주 다양한 사람들 앞에 섰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설교가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질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설교자로서 우리의 사명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라
교회 안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설교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마치 부러진 팔밖에 고칠 줄 모르는 의사와 같다. 모든 부류의 청중에게 폭 넓게 다가가려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여려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 9:22)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단지 전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약한 자들’ 즉 양심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약한 자가 되었다. 자신의 자유를 연약한 자들을 위해 제한했던 것이다.
설교자에게는 다양한 청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희생이 요구된다. 모종의 유머를 즐기거나 소수 집단을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으로 부르는 자유, 우리에게 흥미로웠던 책이나 영화에서 예화를 사용하는 자유, 우리의 교욱 수준이나 영적 헌신도에 기초해 사람들에게 설교하려 드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때로 그렇게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일처럼 느낄 때도 있다.
일례로 여성 운동에 반감을 가진 목사가 지나가는 말이라도 그들의 지도자나 활동에 대해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 여성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거리감을 조장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을 포기할 때, 우리가 얻은 것은 설교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이다. 만일 바울이 율법을 무시했다면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문제에 대해 전혀 민감하지 못한 설교자를 여성 성도들은 신뢰하지 않으려 한다. 왜 우리가 이런 곤란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고 현명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그들은 목회자에게서 한 마디라도 공격적으로 느끼면 쉽게 도망가 버린다. 이미 울타리 안에 안전하게 있는 사람들은 목회자가 큰 실수를 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가가려 하는 새신자들은 야생 칠면조처럼 쉽게 놀라 달아나 버린다.
한 젊은 부부가 시카고 근교로 이사를 와서 몇 달 동안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남편이 실직해 있는 동안 교회에서 도움을 주었다. 교회의 목사도 그 남편을 몇 차례 만났다. 그는 생태학 학위를 소유한 자였고 교회에 깊이 헌신하고자 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와 아내가 교회에 보이지 않았다. 목사는 몇 번이고 그 부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몇 달이 자나서야 비로소 그 남편과 함께 식사를 나눌 수 있었다. 목사는 왜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가 대답하길 “목사님께서 과학을 경시하는 설교를 몇 번 하셨지요. 목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의 사고 방식과 다른 것 같습니다.”
목사는 자신이 한 말을 더듬어 보았다. 그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인간의 연약함을 비교하면서 그저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를 던졌거나 수사학적 표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냥 지나가는 미풍이 아니었다. 주님의 제자로서 더 깊이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한 사람을 곁길로 벗어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우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 경비원과 투자 은행가처럼 서로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람들의 말을 청취하고 관찰하는 소설가처럼 하면 된다. 우리는 상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주고 식당이나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경청해 보라.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나 뉴스에서 인터뷰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관찰해 보라. 그들이 자신의 관심을 어떻게 말하는지,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무엇이고 감정은 어떠한지, 그들이 관심을 두는 게 무엇인지 세밀하게 살펴보라. 그들의 대화에 기울여 보라.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은 설교하기 전 매주 목요일에 핵심 그룹을 소집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점심을 나누면서 이번 주 설교의 중심 사상을 말해 주고 그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들리는지 물어본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종종 제기하기도 한다.
어느 주일, 예배 후에 한 여성이 찾아와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몇몇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뉴욕 타임스>에 광고를 실었다고 했다.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흑인의 경험을 끌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소외된 자들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우리 흑인들도 소외된 자들이죠.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어 왔는지 전혀 몰라요. 흑인이라는 이유로 겪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들이죠.”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소수자들이 겪는 불이익에 대해 알게 되었다.
특정 부류의 청중을 목표로 삼아라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동일하게 다루는 법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기심 많은 한 바리새인에게는 거듭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고,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는 생명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각각의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가가셨다.
신약의 서신들은 동일한 신학일지라도 다양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내용이 서로 다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을 향해 부활의 교리를 변호했다. 그런가 하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 여려하는 자들을 위해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 성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진리를 희석시키지 않으면서 청중에게 알맞게 메시지를 조절하신다. 진리는 한 사람의 개인적 상황에 연결될 때 가장 강력한 체험이 일어난다.
일반적인 이야기만 하는 설교는 특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다. 설교는 두세 유형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 놀라운사실은 메시지가 보다 직접적이고 개인적일수록 더욱 보편적이 된다는 점이다.
갈등에 관해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 수 있다. “친구와 함께 방을 쓴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친구가 식사 후에 바로 설거지를 하지 않는 등으로 당신을 짜증나게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결혼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남편이 집에 돌와와 텔레비전 앞에서 머리를 파묻은 채 당신이 하루종일 어떻게 지냈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의 예는 모든 청중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전부가 이런 경험에 공감하고 그 감정이 어떤지 느낄 수 있다.
설교할 때 다양한 청중이 경험하는 삶에 더욱 다가서기 위해 나의 친구인 돈 수니키안의 제언을 사용한다. 설교를 준비할 때 삶의 상황을 알려 주는 눈금표를 만드는 것이다. 몇 개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눈금표의 맨 윗부분에는 가로로 남성, 여성 독신, 기혼자, 이혼자, 동거자 등의 표를 만든다. 눈금표의 측면에는 새로로 다른 연령 그룹들(실직자, 자영업자, 노동자, 경영자), 신앙 수준(헌신적인 그리스도인, 의심이 가득한 자들, 냉소주의자들, 무신론자들), 병든 자와 건강한 자 등의 표를 만든다. 내가 설교하는 대상과 공동체에 기초해 이 눈금표를 만든다. 나는 성경 본문을 연구하고 중심 사상을 발전시킨 후 눈금표를 살펴보면서 이 메시지가 특별하게 들어맞는 둘에서 넷 정도의 교차점을 찾는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본문으로 돈에 관해 설교할 때 눈금표를 살피면서 한 과부를 생각했다. 큰 회사의 사장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죽으면서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 언젠가 그녀가 한 말이다.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저주인지요!” 나는 성도들 중에 수입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알고 있기에 부유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듣고 어떻게 듣고 어떤 느낌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눈금표에서 또 하나의 교차점은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고려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액수에 관신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보신다고 설교했다.
세 번째로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했던 사람들은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방문객들이었다. 아마 그들은 설교를 들은 후 이렇게 말하리라. “목사들이 하는 일이란 돈에 대해 설교하는 것밖에 없어….” 나는 눈금표에 올려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설교에 유머도 포함시키고 반대 의견도 직접 다루었다(때로 나는 교회 안에 특정 부류의 사람들, 말하자면 사업하는 젊은 남성이나 여성 혹은 십대들에게만 설교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럴 경우에 다음과 같이 설교를 시작한다. “오늘 아침에 나는 십대들에게 설교하고 싶습니다. 어른이 된 당신들은 주일 아침 예배에 참석해 짧은 겨울 낮잠을 즐기시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만, 오늘 아침에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하겠습니다. 오늘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청소년들은 우리 교회에 중요한 지체들입니다. 이 설교에 귀를 기울인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이 설교의 모든 적용은 젊은이들에 맞춰진 것이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인들은 드물 것입니다. 사실 간접적으로 들려지는 내용이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보다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예화를 폭넓게 사용하라
우리가 매주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하면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표적으로 삼을 수 있지만, 모든 청중은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거나 하나님에게서 도망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웃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심각하게 느끼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더 잘 할 수 있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격려받기 원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을궁지에 내버려 두지 않고 자신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이런 보편적인 관심사를 다루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예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상에 관심을 갖기보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원리보다 사람들에게 대해 잡담하기를 즐긴다. 좋은 이야기는 한 사람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해 줄 수 있다. 청중은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들의 경험 및 이미지와 연결시켜서 그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 준다.
나는 청중으로 하여금 나의 설교와 정서적으로 열결될 수 있도록 광범위하게 예화를 사용한다. 때로 많은 예화를 스포츠에서 끌어오고 싶을 때가 많다. 이런 예화를 대다수(쇼회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의 여성도들에게 호소력을 얻을 수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화 즉 인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집안 이야기, 가족 이야기, 여성들이 일터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사용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나는 델레비전을 보면서도 예화를 찾으려 한다. 사실 나는 일는 책에서 예화를 끌어오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가 읽는 것을 대부분의 청중은 읽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나와 다른 영역이다. 나의 설교에 그 점을 존중하려 한다.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예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청중이 자신들을 그 이야기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 이야기의 참여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고든 맥도널드가 세례 요한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이를 능수능란하게 보여 주는 것을 보았다. 맥도널드 목사가 상상력을 동원해 요한의 사역을 설명했을 때 모든 청중은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의 기억에 그의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요단강에서 군중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자 경영자 타입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조직적으로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테이블을 설치하고 회개하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꼬리표를 달아 주기 시작했습니다. 꼬리 위에 그 사람의 아름과 가장 큰 죄목이 씌여 있었습니다. 밥이 테이블 앞으로 걸어옵니다. 주최측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꼬리표에 적고 묻습니다. “밥, 당신이 지은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저는 사장의 돈을 유용했습니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큰 펜을 꺼내어 대문자로 ‘공금 횡령자’라고 써서 밥의 가슴에 찰싹 붙입니다. 다음 사람이 나아옵니다. “이름이 뭐죠?” “메리예요.” “메리, 당신이 지은 가장 큰 죄는 무엇입니까?” “저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 험담을 했어요.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을 씷어했어요.” 주최측 사람들은 씁니다. “메리, 험담하는 자.”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찰싹 붙입니다.
한 남가자 테이블로 걸어옵니다. “이름이 뭐죠?” “조지입니다.” “조지 당신이 지은 가장 큰 죄는 무엇입니까?” “우리 이웃이 가진 코르벳(Corvette)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조지, 탐욕자”라고 씁니다. 또 한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옵니다. “이름이 뭐죠?” “고든입니다.” “당신의 죄는 무엇입니까?”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주최측 사람은 ‘고든, 간음자’라는 꼬리표를 그의 가슴에 붙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로 오십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줄을 따라 오셔서 각 사람의 죄 꼬리표를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꼬리표를 떼시고 그것들을 그부늬 몸에 붙이십니다. 이제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분의 몸에 붙은 꼬리표의 먹물은 강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습니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가 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때 모든 청중은 마음 속으로 자신의 죄목을 기록한 후에 자신들의 가슴에 붙였다. 이 예화는 구체적이면서도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금을 울렸다. 나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때로 종이 위에 ‘이이디어 네트워크’를 작성한다. 예를 들어 가정에 대해 설교한다면 종이에 ‘가정’이라는 단어를 쓰고 그 단어에 동그라미를 친 후 마음에 떠오르는 관련 단어들을 기록한다.
‘안락한 가정, 잘 돌아왔어. 집으로 다시 돌아오니 참 잘 됐어. 목장 위에 있는 집,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 빼앗긴 가자어’ 등 이런 연상들은 개인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다른 기억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문화가 가정이라는 말과 연결된 구절이나 느낌을 찾고자 하는 점이다. 이러다 보면 좀 더 호소력 있는 한 개나 그 이상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하라
나는 성도들을 존중하고 그들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것은 내가 모든 사람들을 얻기 위해 모든 모양으로 되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예를 들어, 나는 설교할 때 대화식으로 이끌어간다. 귄위적이고 강의식으로 대하는 태도를 싫어하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다. 이런 태도 때문에 현대인들은 설교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나에게 제발 설교하지 마세요!’). 이런 설교에 대해 사람들은 아이들을 대할 때나 편협한 사고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긴다.
떠 한 가지 내가 노력하는 것은 공감하는 마음을 보이고자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라는 말라기 2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할 때, 청중 가운데 이혼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해돈 라빈슨이 자신들을 미워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나면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여러분들 중에 이혼하신 분들은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시는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혼한 사람들을 미워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혼이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혼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죠. 이혼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증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상처를 주는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설교자가 청중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된 느낌을 준다면 사람들은 좀 더 강한 설교에도 들여려 할 것이다.
내가 청중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또 다른 방법은 설교에서 용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이다. 당신이 전혀 편견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당신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쓸 때 청중은 당신을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나는 성에 대한 표현에서 여성들을 배려하기도 한다. 에를 들어, 어떤 의사에 대해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한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서 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메스가 들려 있죠.” 전략적으로 필요할 때 ‘그’라는 표현보다 ‘그녀’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용어들 중에 ‘대변인’(spokesman)이라는 남성적 표현보다 ‘중성적 표현’(spokesperson)을 사용하려 한다. ‘그’라는 표현보다 ‘그녀’라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 ‘그’와 ‘그녀’를 번갈아 사용하기도 한다. 설교에 여성 대명사를 몇 번만 사용해도 효과는 대단하다(한 가지 극단적인 실험을 해 보라. 한 편의 설교에서 반드시 남성적 표현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 ‘그녀’를 끝까지 사용해 보라. 우리의 설교가 얼마나 남성적인 냄새가 많은지 알게 될 것이다).
소수 민족을 위해서도 그들이 불러 주기를 원하는 식으로 부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찰스’라면 누군가 ‘찰리’ 혹은 ‘척’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검둥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흑인이라고 부르다가 최근 설교에서 아프리카 미국인(African-America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얼마 후 한 여성이 나의 잘못을 친절하게 바로 잡아 주었다. “그 사람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이랍니다.”
진리는 타협하지 말라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강단에서 사과해야 할 때도 있다.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사용한 유머가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비만을 가진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표현을 했습니다. 때로 본의 아니게 어뚱한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저에게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그레이스채플에서 설교하는 동안 나의 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편지를 적어도 한 주에 한 통은 받았다. 누군가 편지를 쓰면 나는 반드시 답장을 보낸다. 심각한 편지를 보낼 때는 나도 깊이 있게 답장을 써서 보낸다. 때로 그들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을 때가 있다. 내가 가진 편견을 깨우쳐 준다. 내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사람들의 비방을 받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생책이다. “편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성경의 위대한 진리를 전하고 싶었는데 당신에게 이해시켜 드리지 못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일에 너무 고심하거나 감정이 상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편지를 받다 보면 질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문장 하나하나에 정신을 빼앗긴다. 이럴 경우에 설교는 방어적이고 눈치만 보면서 뼈대도 없이 애매하게 끝날 수도 있다.
그렇다. 크리스마스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 해 중에서 가장 우울한 때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런 일로 교회가 성탄의 기쁨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어버이날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없는 부모에게는 극심한 고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공경해야 할 부모가 있고 교회가 그분들을 공경하는 것을 막아선 안 된다.
나는 지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강단에서 초조해 하거나 방어적이거나 적대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더 쉽게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지 마세요”라거나 “겉보기에 그럴 듯한 모든 말에 진저리가 납니다”라는 말은 설교자나 회중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목사가 어느 정도 신경을 쓰지 않는 상태에서 설교해야 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시비의 말을 삼가고 가슴에 부담을 담고 말해야 한다. 목사가 강단에서 쫓겨날 각오로 하는 설교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때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들이 되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언제나 건전한 불안감이 들게 마련이다. 성경도 이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도를 걸어야 할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를 원하지만 진리를 타협해가면서 해선 안 된다. 우리가 정도를 걷는다면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관심을 지닌 많은 분류의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 Dr. Haddon Robinson 등 목회자 및 신학자들의 공저로 제작된 The Art and Craft of Biblical Preaching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약력) 미국 서던메소디스트대학교와 달라스신학교(Th.D.) 그리고 일리노이스대학교(Ph.D.)에서 공부했으며 미국 달라스신학교와 고든콘웰신학교 교수 및 덴버신학교 총장직을 역임했다.
<특별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해돈 로빈슨 – 미국 덴버신학교 총장 역임
나는 목회자가 없었던 메사추세츠 두 렉싱턴의 그레이스채플에서 1년여 동안 자주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의 층은 놀랍도록 다양했다.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로부터 고동학교 중퇴자들까지 있는가 하면, 의사, 변호사, 건물 청소부, 정치가들 그리고 신문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투자가가 있는가 하면 최소 임금 노동자들도 출석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도들의 인종과 피부색도 매우 다양했다.
나는 그들 모두의 가슴에 내려앉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매주 다양한 사람들 앞에 섰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설교가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질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설교자로서 우리의 사명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라
교회 안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설교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마치 부러진 팔밖에 고칠 줄 모르는 의사와 같다. 모든 부류의 청중에게 폭 넓게 다가가려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여려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 9:22)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단지 전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약한 자들’ 즉 양심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약한 자가 되었다. 자신의 자유를 연약한 자들을 위해 제한했던 것이다.
설교자에게는 다양한 청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희생이 요구된다. 모종의 유머를 즐기거나 소수 집단을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으로 부르는 자유, 우리에게 흥미로웠던 책이나 영화에서 예화를 사용하는 자유, 우리의 교욱 수준이나 영적 헌신도에 기초해 사람들에게 설교하려 드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때로 그렇게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일처럼 느낄 때도 있다.
일례로 여성 운동에 반감을 가진 목사가 지나가는 말이라도 그들의 지도자나 활동에 대해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 여성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거리감을 조장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을 포기할 때, 우리가 얻은 것은 설교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이다. 만일 바울이 율법을 무시했다면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문제에 대해 전혀 민감하지 못한 설교자를 여성 성도들은 신뢰하지 않으려 한다. 왜 우리가 이런 곤란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고 현명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그들은 목회자에게서 한 마디라도 공격적으로 느끼면 쉽게 도망가 버린다. 이미 울타리 안에 안전하게 있는 사람들은 목회자가 큰 실수를 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가가려 하는 새신자들은 야생 칠면조처럼 쉽게 놀라 달아나 버린다.
한 젊은 부부가 시카고 근교로 이사를 와서 몇 달 동안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남편이 실직해 있는 동안 교회에서 도움을 주었다. 교회의 목사도 그 남편을 몇 차례 만났다. 그는 생태학 학위를 소유한 자였고 교회에 깊이 헌신하고자 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와 아내가 교회에 보이지 않았다. 목사는 몇 번이고 그 부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몇 달이 자나서야 비로소 그 남편과 함께 식사를 나눌 수 있었다. 목사는 왜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가 대답하길 “목사님께서 과학을 경시하는 설교를 몇 번 하셨지요. 목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의 사고 방식과 다른 것 같습니다.”
목사는 자신이 한 말을 더듬어 보았다. 그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인간의 연약함을 비교하면서 그저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를 던졌거나 수사학적 표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냥 지나가는 미풍이 아니었다. 주님의 제자로서 더 깊이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한 사람을 곁길로 벗어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우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 경비원과 투자 은행가처럼 서로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람들의 말을 청취하고 관찰하는 소설가처럼 하면 된다. 우리는 상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주고 식당이나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경청해 보라.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나 뉴스에서 인터뷰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관찰해 보라. 그들이 자신의 관심을 어떻게 말하는지,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무엇이고 감정은 어떠한지, 그들이 관심을 두는 게 무엇인지 세밀하게 살펴보라. 그들의 대화에 기울여 보라.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은 설교하기 전 매주 목요일에 핵심 그룹을 소집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점심을 나누면서 이번 주 설교의 중심 사상을 말해 주고 그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들리는지 물어본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종종 제기하기도 한다.
어느 주일, 예배 후에 한 여성이 찾아와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몇몇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뉴욕 타임스>에 광고를 실었다고 했다.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흑인의 경험을 끌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소외된 자들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우리 흑인들도 소외된 자들이죠.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어 왔는지 전혀 몰라요. 흑인이라는 이유로 겪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들이죠.”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소수자들이 겪는 불이익에 대해 알게 되었다.
특정 부류의 청중을 목표로 삼아라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동일하게 다루는 법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기심 많은 한 바리새인에게는 거듭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고,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는 생명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각각의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가가셨다.
신약의 서신들은 동일한 신학일지라도 다양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내용이 서로 다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을 향해 부활의 교리를 변호했다. 그런가 하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 여려하는 자들을 위해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 성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진리를 희석시키지 않으면서 청중에게 알맞게 메시지를 조절하신다. 진리는 한 사람의 개인적 상황에 연결될 때 가장 강력한 체험이 일어난다.
일반적인 이야기만 하는 설교는 특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다. 설교는 두세 유형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 놀라운사실은 메시지가 보다 직접적이고 개인적일수록 더욱 보편적이 된다는 점이다.
갈등에 관해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 수 있다. “친구와 함께 방을 쓴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친구가 식사 후에 바로 설거지를 하지 않는 등으로 당신을 짜증나게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결혼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남편이 집에 돌와와 텔레비전 앞에서 머리를 파묻은 채 당신이 하루종일 어떻게 지냈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의 예는 모든 청중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전부가 이런 경험에 공감하고 그 감정이 어떤지 느낄 수 있다.
설교할 때 다양한 청중이 경험하는 삶에 더욱 다가서기 위해 나의 친구인 돈 수니키안의 제언을 사용한다. 설교를 준비할 때 삶의 상황을 알려 주는 눈금표를 만드는 것이다. 몇 개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눈금표의 맨 윗부분에는 가로로 남성, 여성 독신, 기혼자, 이혼자, 동거자 등의 표를 만든다. 눈금표의 측면에는 새로로 다른 연령 그룹들(실직자, 자영업자, 노동자, 경영자), 신앙 수준(헌신적인 그리스도인, 의심이 가득한 자들, 냉소주의자들, 무신론자들), 병든 자와 건강한 자 등의 표를 만든다. 내가 설교하는 대상과 공동체에 기초해 이 눈금표를 만든다. 나는 성경 본문을 연구하고 중심 사상을 발전시킨 후 눈금표를 살펴보면서 이 메시지가 특별하게 들어맞는 둘에서 넷 정도의 교차점을 찾는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본문으로 돈에 관해 설교할 때 눈금표를 살피면서 한 과부를 생각했다. 큰 회사의 사장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죽으면서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 언젠가 그녀가 한 말이다.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저주인지요!” 나는 성도들 중에 수입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알고 있기에 부유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듣고 어떻게 듣고 어떤 느낌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눈금표에서 또 하나의 교차점은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고려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액수에 관신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보신다고 설교했다.
세 번째로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했던 사람들은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방문객들이었다. 아마 그들은 설교를 들은 후 이렇게 말하리라. “목사들이 하는 일이란 돈에 대해 설교하는 것밖에 없어….” 나는 눈금표에 올려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설교에 유머도 포함시키고 반대 의견도 직접 다루었다(때로 나는 교회 안에 특정 부류의 사람들, 말하자면 사업하는 젊은 남성이나 여성 혹은 십대들에게만 설교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럴 경우에 다음과 같이 설교를 시작한다. “오늘 아침에 나는 십대들에게 설교하고 싶습니다. 어른이 된 당신들은 주일 아침 예배에 참석해 짧은 겨울 낮잠을 즐기시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만, 오늘 아침에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하겠습니다. 오늘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청소년들은 우리 교회에 중요한 지체들입니다. 이 설교에 귀를 기울인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이 설교의 모든 적용은 젊은이들에 맞춰진 것이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인들은 드물 것입니다. 사실 간접적으로 들려지는 내용이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보다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예화를 폭넓게 사용하라
우리가 매주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하면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표적으로 삼을 수 있지만, 모든 청중은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거나 하나님에게서 도망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웃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심각하게 느끼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더 잘 할 수 있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격려받기 원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을궁지에 내버려 두지 않고 자신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이런 보편적인 관심사를 다루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예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상에 관심을 갖기보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원리보다 사람들에게 대해 잡담하기를 즐긴다. 좋은 이야기는 한 사람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해 줄 수 있다. 청중은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들의 경험 및 이미지와 연결시켜서 그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 준다.
나는 청중으로 하여금 나의 설교와 정서적으로 열결될 수 있도록 광범위하게 예화를 사용한다. 때로 많은 예화를 스포츠에서 끌어오고 싶을 때가 많다. 이런 예화를 대다수(쇼회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의 여성도들에게 호소력을 얻을 수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화 즉 인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집안 이야기, 가족 이야기, 여성들이 일터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사용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나는 델레비전을 보면서도 예화를 찾으려 한다. 사실 나는 일는 책에서 예화를 끌어오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가 읽는 것을 대부분의 청중은 읽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나와 다른 영역이다. 나의 설교에 그 점을 존중하려 한다.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예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청중이 자신들을 그 이야기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 이야기의 참여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고든 맥도널드가 세례 요한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이를 능수능란하게 보여 주는 것을 보았다. 맥도널드 목사가 상상력을 동원해 요한의 사역을 설명했을 때 모든 청중은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의 기억에 그의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요단강에서 군중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자 경영자 타입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조직적으로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테이블을 설치하고 회개하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꼬리표를 달아 주기 시작했습니다. 꼬리 위에 그 사람의 아름과 가장 큰 죄목이 씌여 있었습니다. 밥이 테이블 앞으로 걸어옵니다. 주최측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꼬리표에 적고 묻습니다. “밥, 당신이 지은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저는 사장의 돈을 유용했습니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큰 펜을 꺼내어 대문자로 ‘공금 횡령자’라고 써서 밥의 가슴에 찰싹 붙입니다. 다음 사람이 나아옵니다. “이름이 뭐죠?” “메리예요.” “메리, 당신이 지은 가장 큰 죄는 무엇입니까?” “저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 험담을 했어요.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을 씷어했어요.” 주최측 사람들은 씁니다. “메리, 험담하는 자.”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찰싹 붙입니다.
한 남가자 테이블로 걸어옵니다. “이름이 뭐죠?” “조지입니다.” “조지 당신이 지은 가장 큰 죄는 무엇입니까?” “우리 이웃이 가진 코르벳(Corvette)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조지, 탐욕자”라고 씁니다. 또 한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옵니다. “이름이 뭐죠?” “고든입니다.” “당신의 죄는 무엇입니까?”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주최측 사람은 ‘고든, 간음자’라는 꼬리표를 그의 가슴에 붙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로 오십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줄을 따라 오셔서 각 사람의 죄 꼬리표를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꼬리표를 떼시고 그것들을 그부늬 몸에 붙이십니다. 이제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분의 몸에 붙은 꼬리표의 먹물은 강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습니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가 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때 모든 청중은 마음 속으로 자신의 죄목을 기록한 후에 자신들의 가슴에 붙였다. 이 예화는 구체적이면서도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금을 울렸다. 나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때로 종이 위에 ‘이이디어 네트워크’를 작성한다. 예를 들어 가정에 대해 설교한다면 종이에 ‘가정’이라는 단어를 쓰고 그 단어에 동그라미를 친 후 마음에 떠오르는 관련 단어들을 기록한다.
‘안락한 가정, 잘 돌아왔어. 집으로 다시 돌아오니 참 잘 됐어. 목장 위에 있는 집,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 빼앗긴 가자어’ 등 이런 연상들은 개인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다른 기억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문화가 가정이라는 말과 연결된 구절이나 느낌을 찾고자 하는 점이다. 이러다 보면 좀 더 호소력 있는 한 개나 그 이상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하라
나는 성도들을 존중하고 그들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것은 내가 모든 사람들을 얻기 위해 모든 모양으로 되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예를 들어, 나는 설교할 때 대화식으로 이끌어간다. 귄위적이고 강의식으로 대하는 태도를 싫어하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다. 이런 태도 때문에 현대인들은 설교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나에게 제발 설교하지 마세요!’). 이런 설교에 대해 사람들은 아이들을 대할 때나 편협한 사고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긴다.
떠 한 가지 내가 노력하는 것은 공감하는 마음을 보이고자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라는 말라기 2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할 때, 청중 가운데 이혼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해돈 라빈슨이 자신들을 미워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나면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여러분들 중에 이혼하신 분들은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시는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혼한 사람들을 미워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혼이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혼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죠. 이혼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증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상처를 주는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설교자가 청중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된 느낌을 준다면 사람들은 좀 더 강한 설교에도 들여려 할 것이다.
내가 청중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또 다른 방법은 설교에서 용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이다. 당신이 전혀 편견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당신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쓸 때 청중은 당신을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나는 성에 대한 표현에서 여성들을 배려하기도 한다. 에를 들어, 어떤 의사에 대해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한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서 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메스가 들려 있죠.” 전략적으로 필요할 때 ‘그’라는 표현보다 ‘그녀’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용어들 중에 ‘대변인’(spokesman)이라는 남성적 표현보다 ‘중성적 표현’(spokesperson)을 사용하려 한다. ‘그’라는 표현보다 ‘그녀’라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 ‘그’와 ‘그녀’를 번갈아 사용하기도 한다. 설교에 여성 대명사를 몇 번만 사용해도 효과는 대단하다(한 가지 극단적인 실험을 해 보라. 한 편의 설교에서 반드시 남성적 표현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 ‘그녀’를 끝까지 사용해 보라. 우리의 설교가 얼마나 남성적인 냄새가 많은지 알게 될 것이다).
소수 민족을 위해서도 그들이 불러 주기를 원하는 식으로 부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찰스’라면 누군가 ‘찰리’ 혹은 ‘척’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검둥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흑인이라고 부르다가 최근 설교에서 아프리카 미국인(African-America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얼마 후 한 여성이 나의 잘못을 친절하게 바로 잡아 주었다. “그 사람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이랍니다.”
진리는 타협하지 말라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강단에서 사과해야 할 때도 있다.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사용한 유머가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비만을 가진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표현을 했습니다. 때로 본의 아니게 어뚱한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저에게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그레이스채플에서 설교하는 동안 나의 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편지를 적어도 한 주에 한 통은 받았다. 누군가 편지를 쓰면 나는 반드시 답장을 보낸다. 심각한 편지를 보낼 때는 나도 깊이 있게 답장을 써서 보낸다. 때로 그들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을 때가 있다. 내가 가진 편견을 깨우쳐 준다. 내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사람들의 비방을 받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생책이다. “편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성경의 위대한 진리를 전하고 싶었는데 당신에게 이해시켜 드리지 못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일에 너무 고심하거나 감정이 상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편지를 받다 보면 질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문장 하나하나에 정신을 빼앗긴다. 이럴 경우에 설교는 방어적이고 눈치만 보면서 뼈대도 없이 애매하게 끝날 수도 있다.
그렇다. 크리스마스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 해 중에서 가장 우울한 때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런 일로 교회가 성탄의 기쁨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어버이날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없는 부모에게는 극심한 고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공경해야 할 부모가 있고 교회가 그분들을 공경하는 것을 막아선 안 된다.
나는 지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강단에서 초조해 하거나 방어적이거나 적대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더 쉽게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지 마세요”라거나 “겉보기에 그럴 듯한 모든 말에 진저리가 납니다”라는 말은 설교자나 회중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목사가 어느 정도 신경을 쓰지 않는 상태에서 설교해야 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시비의 말을 삼가고 가슴에 부담을 담고 말해야 한다. 목사가 강단에서 쫓겨날 각오로 하는 설교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때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들이 되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언제나 건전한 불안감이 들게 마련이다. 성경도 이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도를 걸어야 할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를 원하지만 진리를 타협해가면서 해선 안 된다. 우리가 정도를 걷는다면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관심을 지닌 많은 분류의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